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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월11일 밤이었다. 한겨울이지만 매섭게 춥지는 않았다. 이날 최저기온은 영하 6도였다.1
광주시 외곽에 위치한 서광산정 33번지, 광주청년회 임시 사무소에서 10여 명의 청년이 둘러서서 한 사람을 힐난하고 있었다.
곤경에 처한 이는 서른여섯 살 설병호였다. 시대일보 광주지국장이자 광주노동공제회 위원장에 재임 중인 사람이었다. 지역 언론계의 중진이자 노동운동 단체를 이끄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왜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단체인 광주청년회 회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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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회 회원들은 설병호가 광주청년회를 무너뜨리려 획책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설병호가 몇몇 회원에게 접근하여 광주청년회 반대 운동에 가담하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광주청년회는 오래전부터 계급 전선에서 많은 공헌을 해왔는데, 이번에 부르주아 청년 여러 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임한 것을 보니 실망스럽다. 청년회가 노동계급 운동 대열에서 벗어나 부르주아화하고 있음이 틀12월추천주
림없으니, 그를 반대할 필요가 있다고 꼬드겼다는 얘기다.2
모욕감과 분노를 느낀 청년회 회원들은 설병호를 다그쳤다. 신임 집행위원 명단 등 광주청년회 내부 사정을 어떻게 알았느냐, 당신과 내통하는 청년회 회원은 누구냐, 똑같은 노동계급 운동자로서 도대체 왜 광주청년회를 무너뜨리려 하느냐고 닦달했다. 손찌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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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아니었다. 이튿날에는 좀더 공식적인 진상조사 절차가 진행됐다. 광주청년회는 조사단을 구성해 이 사안을 다루게 했고, 조사단은 설병호의 협력자로 의심받는 청년회 회원의 이름을 밝혀냈다. 정윤모였다. 그는 조선일보 광주지국 기자, 노동야학 교사, 광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 광주청년회 부흥위원 등을 지낸 활동력 있는 청년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1월12일 저황금성배당
녁에 광주청년회 집행위원회에 출석해 질문에 답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조사 분위기가 험악했던 것 같다. 정윤모는 책임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우물쭈물하더니, 갑자기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휘둘렀다고 한다. 상황이 갑자기 악화했다. 많은 회원이 몰려들었다. 소란 속에서 정윤모는 단도를 빼앗겼지만, 현장을 벗어나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심야에릴게임공략법
추격전이 벌어졌다. 정윤모는 광주노동공제회관을 피난처로 삼았다. 그 건물은 노동공제회를 비롯해 전라노농연맹회 등 6개 노동운동단체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사무실이었다. 정윤모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청년회 회원은 50명으로 늘어났다. 격앙된 그들은 노동공제회관의 잠긴 출입문을 부쉈다. 결국 건물 안으로 난입했고, 실내에 있던 설병호와 정윤모 두 사람을 폭행했다. 정윤모가 좀더 많이 다쳤던 것 같다. 그는 남선의원이라는 의료기관에 입원했고, 10일간이나 치료받아야 했다. 이것이 첫 번째 습격이었다.
이튿날인 1월13일에 또 한 차례 습격이 있었다. 청년들은 난방 장치인 온돌 두 곳을 파괴했고, 노동운동단체들의 서류와 인장을 탈취했으며, 출입문을 자물쇠로 봉쇄했다.



광주노동공제회관 습격에 앞장선 광주청년회 체육부장 김재명. 피고인 7명 가운데 가장 무거운 벌금 15원 형을 받았다. 국사편찬위원회


갈등 도화선 된 부유층 청년들 영입
뭣 때문에 다퉜는가? 논란의 초점은 광주청년회 신임 집행위원들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해 1월4일에 공석 중이던 집행위원직에 5명이 보충됐는데, 이들은 기왕에 재임 중이던 6명과 더불어 11명의 집행부를 구성하게 됐다. 그런데 신임 위원들이 모두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말로 하자면 이른바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광주청년회 집행부가 부르주아에게 점령당했고, 더 나아가 청년회 자체가 부르주아화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었다. 사실무근인 낭설은 아니었다. 면면을 보자. 정상호(대지주), 지창선(지주), 조창준(지주), 최준기(호남물산주식회사 지배인), 김범수(의사)가 곧 신임 집행위원이었다. 지주이거나 상공업 경영자, 의사 등의 직위에 있는 청년들이었다. 특히 신임 위원장 정상호는 대지주 정낙교의 아들로 독일 유학까지 다녀온 이였다.
비판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들이 집행위원에 오른 까닭은 청년회관 신축에 자금을 댈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10일 전에 예기치 않은 화재로 청년회관 건물이 소실된 사건이 있었다. 1925년 12월24일 새벽에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전소했던 것이다. 그 전까지 청년회관 건물은 광주 지역 사회운동의 한 근거지였다. 광주청년회를 비롯해 16개 단체가 그 건물에 사무소를 두고 있었다. 청년단체, 사상단체, 노동자·농민단체, 언론기관, 문화운동 단체 등이었다. 여러 사회단체가 어우러져 활력을 뿜어냈다.
광주청년회 집행부는 대책을 논의한 끝에 부흥위원회를 특별히 설립해, 종전의 회관보다 더 큰 규모의 회관을 건설하기로 결의했다. 신임 위원 보충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비판자들은 “새 회관을 짓기 위해서 단체의 명예를 희생하고, 돈 있는 사람에게 머리를 숙였다”고 욕했다.3 단체를 팔아넘기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광주 지역의 대표적인 청년단체 광주청년회와 노동자단체인 광주노동공제회가 충돌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언론에서는 ‘광주청년회·광주노동공제회 분규’라고 부르거나 ‘광주 사건’이라고 약칭했다. 이 사건은 전 조선 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광주 지역을 넘어서 전체 조선 사회운동권의 분규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운동 탄압 기회로 활용한 일본 경찰
노동공제회를 지지하는 사회단체들이 먼저 움직였다. 사건 발발 이틀 뒤인 1월15일 전라노농연맹 소속 26개 단체 대표들이 광주에서 긴급 총회를 개최했다. 그 결과 광주청년회에 습격 이유를 질문하고, 그 죄상을 성명서를 통해 널리 알리기로 결의했다. 서울의 큰 단체들도 움직였다. 조선노농총동맹은 특파원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했고, 그를 토대로 습격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리는 전말서 3천 장을 인쇄해 배포했다.4
1월31일에는 한양청년연맹 등이 주관하는 ‘광주청년회 성토회’가 열렸다. 13개 단체 80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광주청년회를 비난하는 결의가 채택됐다. 광주 사건의 성격은 자본가에게 매수된 자들이 노동운동가에게 계급적 압박을 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광주청년회 간부 13명의 제명을 요구했다.
광주청년회를 지지하는 사회단체들도 움직였다. 1월30일, 경성청년연합회는 재경사회단체 대표 40여 명을 결집해 ‘광주 사건 진상보고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노동공제회를 질책하고, 문제의 꼬투리를 제공한 설병호, 정윤모 등을 제명하라고 요구했다. 2월14일 전북청년연맹에서는 특파원의 전말 보고를 듣고, 광주노동공제회가 광주청년회에 사과할 것을 권유하는 결정을 채택했다. 또 서울의 조선노농총동맹에 대해서는 지방의 국부적인 문제를 전 조선의 운동선으로 확대한 것에 대해서 운동선 교란의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일본 경찰도 나섰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불온한 조선인들을 사상범이나 정치범으로가 아니라, 일반 형사범으로 징벌할 기회였다. 반일 기운을 내장한 광주 지역 운동권을 위축시킬 수 있는 사안이었다. 광주경찰서는 노동공제회관 습격에 참여한 청년 13명을 체포했다. 가택 침입, 폭행, 건조물 파괴 등의 혐의였다.
이 중에서 7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한길상(31), 강석봉(29), 김흥선(29), 김재명(27), 지용수(23), 강영석(21), 김태봉(미상)이 그들이다. 이름난 투사들이었다. 광주 지역 3·1운동의 주역(한길상, 강석봉)이었고, 뒷날 비밀결사 조선공산당(한길상, 강석봉, 김재명, 강영석)과 공산청년회(김흥선, 김재명, 지용수, 강영석)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청년들은 석 달 동안 옥중에 수감됐다. 그동안 광주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의 재판을 받았는데, 최종심 결과는 김재명 벌금 15원, 강영석 10원이었다. 그 외 피고인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야단스러운 소란에 비하면 결과는 별 볼 일이 없었다. 청년들이 광주로 되돌아온 것은 4월23일이었다. 광주역에는 가족과 동지들 100여 명이 출영했다고 한다.



광주청년회원들의 광주노동공제회관 습격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조선일보 1926년 1월14일치.


두 세력 간 전략적 불일치 해소 성과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 시대일보 특파원 김동환이 주목할 만한 표현을 남겼다. 그는 ‘순수 프로운동과 전략적 프로운동’의 시비 문제가 원인이라고 보았다. ‘프로’란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리킨다. 노동공제회는 ‘순수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대표하고, 광주청년회는 ‘전략적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을 지향한다는 지칭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전자는 순수한 노동계급 혁명을 지향하고, 후자는 식민지 현실을 고려한 전략적인 노동계급 혁명이므로 곧 민족해방혁명을 지향한다는 말이었다.
탁견이었다. 이 분규는 비합법 비공개 영역에 존재하는 두 비밀결사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었다. 광주노동공제회는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표면 단체였고, 광주청년회는 고려공산동맹이라는 비밀결사의 표면 단체였다. 표면단체란 비밀결사의 공개영역 대중운동을 대행하는 합법 단체를 뜻했다. 일제강점기에 널리 사용되던 용어였다. 사람들은 전자를 화요파, 후자를 서울파라고 즐겨 불렀다.
이 분규가 진행되던 당시만 해도 조선공산당의 강령은 미처 확정되지 않았다. 대체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론에 가까웠다. 1925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때까지만 해도 반기독교 대회를 소집하는 등 반종교 운동을 벌였다. 조선공산당이 민족해방혁명론을 수용하고 항일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수용한 것은 1926년 2~3월께부터였다. 광주 분규가 발발한 직후였다.
그에 반해서 고려공산동맹의 강령은 민족해방혁명론이었고,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 정책을 꾀하고 있었다. 1924년부터 그러했다. 사회주의를 용인하고 일본에 맞서는 대중운동에 헌신한다면 설령 부르주아 출신이라 하더라도 함께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광주 분규가 더 이상 전국적인 분란으로 확장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두 세력 사이에 존재하던 전략적 불일치가 해소됐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운동 통합의 사상적 기초가 마련됐던 것이다.
광주 분규가 갖는 의의는 사회주의 운동권 내부에 성찰을 가져왔다는 점일 것이다. 습격 사건의 피고인으로 광주로 되돌아온 청년들이 사회주의 대열의 통일운동에 뛰어든 것을 보면 말이다. 고려공산동맹의 절반쯤 되는 구성원들이 1926년 11월에 자기 둥지를 떠나 조선공산당에 입당할 때, 광주 분규에서 행동대로 활동했던 광주청년회 간부들은 그 대열에 적극 참여했다. 청년회와 행동을 같이하던 광주 운동권이 대부분 이 길을 걸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천기예보’, 동아일보 1926년 1월13일.
2. ‘말썽으로 직접 행동’, 동아일보 1926년 1월15일치, 5면.
3. 특파원 金東煥, ‘광주청년회 사건 진상 4, 자본가 영합은 何故’, 시대일보 1926년 1월21일치, 2면.
4. ‘노농총동맹에서 광주 사건 전말을’, 조선일보 1926년 1월23일치, 석간 3면.